▲ 소설 <9번의 일> 표지ⓒ 한겨레출판
ㄱ씨는 한 회사에서 26년을 일했다. 한달 전 새로운 부장은 그보다 나이가 어렸다. 부장은 그를 불러 이야기하는데 퇴직이라는 단어만 입에 안 올렸을 뿐이지 나쁘지 않다는 조건이라며 퇴직금을 받을 것을 종용한다. ㄱ씨는 이미 퇴직을 요구하는 듯한 재교육을 2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회사 내에 파란을 일으킨다. 연장자인 ㄱ씨 대신에 사정이 힘들었던 다른 사람이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름 성실하고 회사에 애정을 가지고 함께 커왔다고 생각했던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적잖게 당황한다.
이 상황은 김혜진의 소설 <9번의 일>에서 퇴직하기를 요구하는 회사와 동료들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은 화자인 ‘나’에게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가 다만 경제적 어려움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지, 26년간 회사와 자신을 이어주던 게 겨우 얄팍한 월급 통장 하나뿐이라고 여기는지 되묻고 싶다.”라고.
소설 <9번의 일>에서는 차마 다른 사람에게는 터놓지 못할 상처와 부끄러움, 그리고 슬픔 등 ‘나’에게 닥친 ‘퇴직’이라는 관문을 어떻게 견뎌내는가를 그의 감정을 따라 고찰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던 일터에서 하루아침에 내쳐진다는 것을 나이가 들면 당연히 겪는 특별할 것 없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반론을 제기한다.
‘나’는 느닷없는 동료들의 불만에 대해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 그동안 이 회사에서 겪은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되짚어 보며 이 모든 것이 허상였음을 깨닫는다.
직장을 다니는 동안 그는 누구에게도 이런 원색적인 비난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서운함과 불편함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졌다. 그는 믿을 만한 동료들과 일했고 동료들은 그를 믿었다. 믿음은 하루를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p.35)
점잖게 퇴직을 권유하는 부장과의 상담이 퇴직수순 1단계라면 퇴직을 강요하는 재교육은 2단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의도를 알면서도 쉽사리 퇴직을 결정하기 힘들다. ‘나’는 수리와 설치, 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통신회사 현장팀에서 26년간 일했다. 하지만 그에게 요구하는 재교육이란 이와 관련이 없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며 교육영상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는 게 수십 년간 설치 기사로 일했던 자신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이런 과정이 퇴직을 종용하는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 동료들도 재교육에서 점수를 받지 못해 밀려나듯 회사를 나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는 재교육에서 최하 점수를 받고 퇴직 수순단계인 3단계인 타 지역 상품 판매 부서로 발령받아 기존의 경력과는 관련없는 일을 맡게 된다. 그가 재교육에서 받았던 평가에는 교육 일수, 출결 사항, 지각 사항, 수업 태도, 최종 평가 점수를 도표로 정리한 것이었다.
15시 07분 입실, 7분 지각, 18시 12분 입실, 12분 지각.보고서 제출 기한 지연 2회, 보고서 분량 미달 3회, 도서 미지참 3회. 눈가를 문지름, 한 손으로 턱을 굄, 눈을 감고 하품을 함, 목을 긁음, 물 마심, 휴대폰을 확인함. 발을 주무름.(P.60)
인터넷 상품 계약을 이뤄내지 못하면서 그의 월급은 30퍼센트가 삭감된 채 지급되었다. 그리고 외국인 기숙사 공유기를 교체해주었던 선의의 행동이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서 열심히 일한다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다.
원래 수리 일을 해왔던 터라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그 일이 관할 수리 기사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이미 수리 업무에서 영업 업무로 바뀌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소설< 9번의 일>은 나이가 먹었다는 이유로 무작정 퇴직을 권하는 사회 속에서 나이와 관련 없이 자신이 닦아온 기술이 있는 노동자의 남은 인생에 대해 정부와 사 회는 그들에게 맞는 일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것 같다.
머리를 써서 교묘하게 억지로 퇴직하게 하는 것 보다는 그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에너지를 그들이 쌓아올린 일들과 연계해서 다시한번 달릴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소설 <9번의 일>은 <딸에 대하여>의 저자 김혜진이 2년 만에 쓴 장편소설로 통신회사 노동조합을 취재하면서 '일하는 사람 이야기 혹은 일에 대한 이야기 그 둘 사이를 채운 어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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