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 리뷰

[책리뷰]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한국 소설에도 하이퍼리얼리즘이 있다?

고고와 디디 2020. 3. 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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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마켓에 한 사람이 하루에 백개씩 중고 거래할 물건들을 올리고 있다. 언뜻 보면 중고 마켓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는 새 상품을 뜯지 않고 인터넷가보다 조금 더 싸게 해서 물건들을 내놓는 터라 환영할 만하다. 댓글들도 다양한 물건들을 하나같이 싸게 팔아줘서 고맙다는 칭찬 일색이니 그렇다.
 
하지만 서비스 기획자 입장에서는 한 사람의 글로 도배되어 있으면 중고마켓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묻힐까 고민이 된다. 게다가 그 물건들이 횡령한 물건이나 장물일 수 있다는 우려도 된다.
 
이런 사태는 장류진 작가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보여주는 판교 IT 기업에서 운영하는 우동마켓(우리 동네 중고 마켓)에 ‘거북이알’이라는 아이디를 쓴 사용자가 물건을 과도하게 파는 바람에 일어나는 해프닝을 묘사한 것이다.
 
이쯤 읽었을 때 드는 생각은 이젠 어떻게 이 ‘거북이알'을 추적해서 그 사람을 제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되리라 예측했었다.
 
회사에서는 영어 이름을 장려하는 바람에 안나라는 이름을 갖게 된 ‘나’가 '거북이알'에 관한 일을 해결하려 한다. '거북이알’이 거래하는 물건을 하나 사서 ‘거북이알’과의 만남을 추진하는 ‘나’의 분투기를 지켜보면서 분명 그는 막무가내일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는데 사실상 만나고 보니 그렇지 않았다.
 
주변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세태에 '거북이알'의 회사 생활 속 애환이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주연이 아닌 조연의 삶까지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이러한 화법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두고 쉽게 단정내리는 나의 모습이 겹쳐져 보인다.
 
이 소설이 재미있었던 것은 이런 나의 급한 성격으로 인해 놓치고 있는 의외의 사정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이 소설에는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눈으로 문제점을 하나씩 해결하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예측했던 일들이 하나씩 깨져 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할까. 반전 아닌 반전 느낌을 주는 소설이기에 읽는 내내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거북이알’이 하루에 백개씩 물건을 팔 수밖에 없던 속사정은 회사 갑질의 희생자로서의 '거북이알'의 가여운 삶을 동시에 보여준다. 의견 하나 냈다가 꼬투리 잡혀 월급을 포인트로 받게 된 '거북이알'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최대한 역이용하면서 손해받지 않으려는 몸부림 끝에 일어난 일이다.

'거북이알'은 포인트를 돈으로 바꾸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잘 팔릴법한 물건들을 포인트로 한두개씩 주문한 다음, 사진을 찍어 물건을 중고마켓에 올린 후 댓글이 달리면 직접 만나서 물건을 거래해온 것'이 지금 이 상황에 적절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회사의 갑질 행태는 주변에서 한번쯤 봤을 법한 일로 공감이 간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갑질에 매몰되지 않고 나름대로 반격하는 한방을 보여주는 '거북이알'의 태도에 작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군분투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느껴진다.
 
앞서 다룬 소설을 표제작으로 내세운 장류진 작가는 이 소설집 안에 8개의 단편 소설을 묶어놓았다. 그 중 소설 <잘 살겠습니다>는 이렇게 흔한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을까 놀랐던 소설이다. 몇 달 전 또는 몇 해 전 내가 직접 겪은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블로그에 여기저기 떠다니는 이야기로서 읽었다. 하지만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고 나서 이 작가가 그려내는 화법에 반한 나로서는 뭔가 독특한 게 있지는 않을 까 싶어 다시 한번 <잘 살겠습니다>를 읽게 되었다.
 
<잘 살겠습니다>는 청첩장을 주고 받는 데 있어 지켜야 할 예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나’가 결혼을 앞두고 3년간 교류가 없던 빛나 언니에게 청첩장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와 친하지 않던 그녀가 굳이 만나서 청접장을 달라고 하는 이유가 이어지면서 역시나 찜찜한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 읽을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면 두 번째 읽다보니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하는 ‘나’가 빛나 언니의 속물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속시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지껏 주변에서 많이들 그러니깐 문제될 것 없다고 그냥 지나치던 일들이 이 소설 속 화자의 매서운 분석에 정신이 번뜩 난다. 범죄가 아니라 해서 가볍게 여길 것이 아니라 저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겠다는 다짐이 든다.
 
장류진 작가는 2018년 창비 신인소설상으로 등단한 이후 빠른 속도로 독자와 문단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은 창작과비평 웹사이트에 공개되면서 SNS를 통해 누적 조회수 40만 건에 이를 정도로 사랑을 받은 <일의 기쁨과 슬픔>을 포함해 8개의 소설을 담고 있다.
 
정이현 작가는 이 소설을 두고 한국 사회를 설명해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이라고 극찬했으며 이장욱 작가는 시의적 모티브와 현대적 삶의 디테일, 탁월한 가독성, 그리고 예민한 사회적 감각을 다 갖춘 작가라고 추천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