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 사진 내게 무해한 사람 표지ⓒ 문학동네
단편 <그 여름>에서는 학창시절 친했던 이경과 수이가 직장을 갖게 되면서 끈끈했던 사이에서 이해하고 싶지 않은 관계로 변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학교에 간 이경과 직업학교로 간 수이는 서로 다른 생활반경에 살면서 점점 멀어져 갔다.
항상 미래만을 말하며 불만사항에 대해서는 입 꾹 다물고 입밖에 내뱉지 않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수이가 이제는 이경에게는 버겁고 오히려 자신의 약점을 부끄러움 없이 노출하는 새로 만난 친구들의 억눌리지 않는 자아가 오히려 멋져 보인다.
이경은 대학에서 알게 된 아이들을 생각했다. 주량에도 안 맞는 술을 잔뜩 마시고 울기도 하면서 주정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약점을 부끄러움 없이 노출하는, 억눌리지 않은 아이들의 자아가 이경은 신기했었다. 십자인대가 나가도, 평생의 꿈이 시들어버려도 그 슬픔을 한 번도 토로하지 않았던 수이가 그제야 이경은 낯설게 느껴졌다. (p.24)
나에게도 단짝친구였던 C가 있었다. 대학시절 내내 붙어 다니며 순대 한 접시에 물 한잔 마셨을 뿐인데 항시 만나면 즐거운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사회에 나가 직장인이 되고 나서 몰랐던 가치관을 하나둘씩 그 모습을 드러낼 때 더 이상은 받아주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관계가 소원해져버렸다.
이경이 학창시절 수이와의 즐거운 한때를 기억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녀와의 즐거운 기억들이 참 소중하지만 너무도 다른 가치관 탓에 자꾸 부딪치는 것에 지쳐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 수년이 지나면 <그 여름>의 이경처럼 그때를 후회하며 그녀에게 유해한 사람이 된 나를 후회하게 될까?
모임에서 후기를 남기던 나에게 A는 ’너는 잘 웃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상은 무겁고 상처를 잘 받는 아이이다.‘라고 정곡을 찌르는 순간 나는 어쩌다 방어막을 만들어온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고민이 있었던 찰나 만난 단편 <손길> 속 혜인이를 키워온 숙모에 대한 묘사 부분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숙모는 삼촌과 함께 혜인이를 사랑과 애정으로 키워오다 삼촌이 사고 때문에 죽자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혜인이는 이런 숙모에 대해 회고하고 있는데 어릴 적부터 가벼운 사람으로 보여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강박에 버텨오던 사람이 더 이상 웃지 못할 남편 사고 소식에 그만 멍해져 버린 거라고 숙모가 없어진 것에 대해 두둔 중이다. 남들이 봤을 땐 숙모에게 존재감 없는 혜인이기에 버리고 갔다고 생각할 테지만 혜인이는 그녀의 여린 부분을 직시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p.231)
그리고 비슷하게 나의 여린 구석을 알아봐준 A도 나에게는 혜인이 같은 존재였다. 분명 혜인에게는 유해한 사람이었으나 혜인은 그 악의 없음에 그녀를 두둔하는 글을 읽다보니 혜인이야말로 숙모에게는 한없이 무해한 사람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가까운 사람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바로잡기 위해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할 때가 있다. 친한 사람이 가족이라면 더욱더 강압적이 될 수도 있겠지. <지나가는 밤>에서는 윤희와 주희 자매가 그렇다. 모범생인 윤희와 달리 잘 놀고 집에는 붙어 있을 생각이 없던 주희가 윤희는 못미덥다. 게다가 혼전임신으로 마뜩치 않은 남자에게 시집가버린 주희가 참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개입 하는 정도로 안 되니 윤희는 주희를 포기하고 연락두절인 관계가 된 것을 볼 때 윤희는 참 주희에게 유해한 사람이구나 싶다. 기어이 이혼하고 아이까지 뺏긴 채 돌아온 주희가 힘들었을 그 공백 기간을 생각하기 시작한 윤희를 보면 무해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을 혼자 겪으면서도 자신에게 끝까지 연락하지 않았던 주희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겨우겨우 짐작하면서 눈물을 참았다. 주희가 눈을 감고 말하기 시작해서야 윤희는 참지 못한 눈물을 베개 위로 조금씩 흘릴 수 있었다. (p.101)
가족이란 유해와 무해한 사람 그 어느 중간쯤은 아닐까. 작가는 끝까지 담담한 문체로 일관한다. 처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그 중간쯤에서 윤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주희에게 하고 있음을 묘사해준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이렇게나마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윤희의 속내를 과하지 않게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가 소설 단편집을 모아 낸 책 제목으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고 지었다. 유해라는 단어가 한끗 차이로 무해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상에 정답이 없는 우리 세상에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단편 속 인물들처럼 남들이 가볍게 넘어갈 일들에 대해 세심하게 고민하고 반성하는 면모를 부각시킨 작가의 묘사에 작가가 얼마나 남들에게 무해한 사람이 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Review >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젠체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말하다. (0) | 2019.10.04 |
---|---|
웹소설로 썼으면 대박났을 소설 (0) | 2019.09.17 |
오늘도 '찌질한' 나에게 건네는 위로 (0) | 2019.05.15 |
보호받지 못한 사람들 (0) | 2019.03.26 |
개구리남자 연쇄살인마 (0) | 2019.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