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언변으로 희망이 없는 이들에게 믿음을 미끼로 돈을 갈취해가는 자칭 목사들의 행태들은 수년 전부터 익히 들어온 이야기다. "주변에 이런 목사가 있다더라"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어봄직도 하다. 그런데 마을 제일의 폭군이 말해준 거라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는 애니메이션 <사이비>에서 사건을 지켜보고, 폭로하며, 막으려던 김민철에 대한 이야기다. 김민철은 딸이 어렵사리 모아놓은 등록금이 담긴 통장을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나가고, 카드 게임을 하다가 질 것 같으면 판을 엎어 버리며, 술집에 갔다 하면 시비가 붙는 인물이다. 감독이 이야기하듯 "거대한 벽처럼 소통이 안 되는 인물"로, 말보다 주먹이 앞선다.
이런 그가 파출소 게시판에 버젓이 붙어 있는 수배 전단 속 사기꾼의 존재를 마을 사람에게 알린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은 진짜입니까?
아무것에도 매달릴 게 없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뭐든 붙잡고 싶은 대상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들은 진실을 애써 부인한다. 그들에게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믿을 대상 자체가 필요할 뿐이다. 더욱이 진실을 말하는 그가 신뢰도 0%인 마을의 폭군이라면 들을 가치도 없는 정보라고 세뇌하기 쉬울 것이다.
장로 최경석과 목사 성철우는 수몰예정지인 마을에 들어와 기적을 행한다. "마귀들이 사람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려는 계략"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가짜 샘물을 가져와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을 일어서게 하는 공연(?)을 보여주며 사람들의 절박함을 돈으로 산다. 그들의 목표는 마을 사람들의 보상금을 모두 빼앗는 것이다.
이웃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인간 군상들도 보인다. 병든 할머니와 지적장애인인 손자, 폐병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남편, 등록금이 없어 대학에 붙고도 전전긍긍하는 딸과 어머니다. 그들이 매달릴 곳은 오직 신뿐이다.
하필 왜 사이비들은 '힘든 사람'을 겨냥했나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말자. 기댈 곳 없는 사람이기에 기적 퍼포먼스에 쉽게 빠져드는 것이다. 정확히 그 지점을 예상했기에 장로 최경석은 거짓을 보여주면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현실은 냉혹한 곳이라 예상처럼 흘러간다. 아픈 할머니와 병든 아내는 죽고, 딸은 등록금을 빌미로 술집에서 청춘을 허비한다. 술주정뱅이 김민철이 딸을 어렵게 술집에서 빼내 왔는데 딸은 "제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데 이게 모두 다 가짜라면 저는 왜 태어난 걸까요?"라고 반문한다.
이쯤 되면 사이비들은 사람들의 아픈 곳을 콕 집어 위로하는 척하며 이상한 논리를 심어놓는 데 제대로 성공한 듯하다. 지적장애인이 '천국에 가려면 사탄인 김민철을 죽이면 된다'는 신념으로 그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인생을 아무리 개차반으로 살았어도 김민철은 마을을 사이비로부터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뛴다. 그러나 "형님은 나쁜 사람이다. 누구 붙잡고 이야기해도…. 여태껏 모르셨구나. 형님 편 아무도 없어"라는 말만 듣는다.
연상호 감독은 전작 <돼지의 왕>을 통해 인간의 양면성을 꼬집어 말한 바 있다. 이번에는 거짓을 말하는 선한 자와 진실을 말하는 악한 자를 동시에 내세워 세상의 명암을 제대로 보여준다.
전작 <돼지의 왕>에서 살아있는 목소리 연기를 보여줬던 양익준과 오정세, 박희본은 각각 김민철, 성철우, 김영선 역으로 열연했다. 특히 이들의 대립 구도가 극을 이끌어가기에 자연스러운 연기 흐름과 톤이 중요했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은 주인공의 목소리를 먼저 녹음해 배우들의 습관이나 호흡, 목소리 연기에 사용된 제스처나 움직임을 그림체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이런 신선함은 해외에서 이미 통했다. <사이비>는 애니메이션의 원조인 일본의 히데아키 아노 감독의 < 에반게리온 Q >, 마사히로 히로다 감독의 < 드래곤볼Z > 및 영국, 브라질 등의 총 9편의 애니메이션과 경쟁해 제46회 시체스국제영화제 애니메이션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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