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책 리뷰

읽다 보니 타인들에게 힐링 받는 묘한 책

고고와 디디 2019. 12. 1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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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표지ⓒ 마시멜로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로맨스 작가를 내세웠다. 분명 리안 모리아티의 소설 <아홉명의 완벽한 타인들>을 읽게 된 이유는 '최고의 건강 휴양지 프로그램 열흘 후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찬 이야기 때문인데 어느새 주인공인 작가 프랜시스의 위트 있는 내레이션에 푹 빠져 읽게 되었다.
 
로맨스 작가로서 직업의 위기를 맞이하는 프랜시스에게 스릴러 장르를 쓸 것을 권유하면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프랜시스는 자기가 만든 인물을 죽일 순 없었다.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릴 순 있겠지만, 죽이다니, 그렇게 심한 일은 할 수 없었다.(p.44)

로맨스 작가로 시작했고 성공했지만 지금은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상황을 뻔히 아는 프랜시스이지만 로맨스 작가로서의 자부심은 여전했다. 이런 그녀에게 장르를 바꾸라는 말은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마음속으로 삭히며 위트 있게 자신은 스릴러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면을 보여준다.

그녀는 작가로서의 명성이 한풀 꺾이고 힘든 상태. 그녀가  '평온의 집'을 찾은 게 이해가 된다. 하지만 그녀가 이 힐링 프로그램을 선택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젊은 남자 폴에게 연애 사기를 당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은 상태이며 혼자서는 극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좌절 때문이 더 심각한 상태였기에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내려가다 보니 프랜시스는 스스로 충분히 이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이라는 이름조차 가짜인 남자에게 돈까지 뜯긴 프랜시스는 같은 처지의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한 행동 때문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피해자 중 자신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여자를 만나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그녀에게 수표를 끊어준 것. 프랜시스에게는 그것이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는 방법이었고, 자기 인생을 통제하는 방법이고 그 남자 때문에 파괴된 인생의 선로를 복구하는 방법이었다. (p.115)

 

여전히 자신이 연애 사기로 돈을 잃었다는 사실이 어안벙벙하지만 그녀는 그 사기꾼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다른 피해자의 마음도 보였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상처도 아직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아픔까지 어루만지려고 하는 이 매력덩어리 프랜시스에게 나 역시 힐링을 받았다. 프랜시스가 어떻게 '평온의 집'에서 치유받는 가 지켜 보려다가 이미 치유된 느낌이다.

프랜시스의 작가적 재능 역시 좀더 세련된 문체가 갖고 싶던 나의 시선을 끈다.  프랜시스는 평온의 집에서 직원인 마샤가 "훨씬 행복하고 건강하고 가볍고 자유로워져서 평온의 집을 나게 될 것이라는" 말 한마디에 다음과 같이 프랜시스는 치유가 된 자신을 꿈꾸는 중이다.

완전히 변한 프랜시스는 집으로 돌아가 스릴러를 쓰거나 비밀로 가득한 다채로운 인물들과 유쾌하고 특이한 악당이 나오고 살인이 난무하는 전통 추리 소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촛대나 독약을 탄 차로 등장인물을 죽이면 재미있을 것이다. 배경은 건강휴양지로 하고! 체육관에서 본 길게 늘어나는 녹색 고무 밴드로 살인을 저지르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153)

상상조차도 작가로서의 위트를 한껏 활용하는 이런 프랜시스를 누군들 안 좋아하리.

작품 반도 읽기도 전에 깔깔거리며 웃다가 가슴이 뻥 뚫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하는 이 작품에는 프랜시스 만큼이나 가슴 아린 서사를 지닌 인물이 여덟 명이나 더 나온다.

작가를 꿈꾸는 그리고 여러 번 연애에 데인 전적이 있는 나에게는 프랜시스가 특효약이었던 것처럼 독자들 자신이 가진 아픔이 무엇인가에 따라 주목하는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문득, 다른 독자들은 어떠한 인물들에게 힐링을 받았을까 궁금하다.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잘 짜여진 극이 보여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난 누구보다도 인간적이고 솔직한, 그리고 그런 속내를 유려한 입담으로 표현한 프랜시스에게 치유받았다.

그리고 작가답게 산책을 하는 도중에도 자신이 살아온 삶의 속도에 고찰하는 프랜시스를 지켜보며 다시금 일상 속에서 소재를 낚는 일이야말로 내가 지금 이순간을 버티고 살아가는 하는 특효약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조가 속도를 높이라고 재촉하는 이유는 프랜시스의 소설이 판매가 저조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조는 불길한 징조를 봤기 때문에  '이 장엔 음모를 추가해야 해요. 독자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어떨까요?' 같은 의견을 낸 것이다. 프랜시스는 잠든 노파처럼 의견을 무시하고 결국 직업까지 위태롭게 만들어버린 거고, 프랜시스는 멍청이였다. (p.206)

프랜시스는 산책을 하며 자신에게 닥친 작가적 위기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서 고민하는 중이다. 로맨스밖에 보지 않던 그녀가 다른 사람의 조언도 듣지 않았는데 다시금 조언들을 고찰한다. 빠르게 걸으면서 혹은 느리게 걸으면서 그렇게 산책을 하면서도 그녀는 내적 성장을 겪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