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독자로서는 영감으로 썼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보다 실제 책 한 권이 탄생되기까지 과정을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는 이같은 의문점을 풀어주기에 제 격이다. 작가가 소재를 어떻게 얻는지,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동력은 어디서 오는지, 소설가로서의 애환은 어떤 것인지. 이 영화에는 한 장면도 버릴 게 없다.
영화의 배경은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영국이다. 영화는 인기 작가 줄리엣 애쉬튼(릴리 제임스)이 건지 섬에 있는 농부인 도시 애덤스(미힐 하위스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줄리엣이 예전에 헌책방에 팔아넘긴 책 <엘리아 수필 선집>을 건지 섬에 있는 도시 애덤스가 읽게 되면서, 두 사람은 이어지게 됐다. 편지를 주고받던 중 줄리엣은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이라는 묘한 이름의 독서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줄리엣이 북클럽에 관심을 갖고 건지섬을 찾아가는 순간 작가 줄리엣의 신간 소재는 결정된다. "아무리 초라해도 나를 이끄는 곳으로 가야 하는 이유"로 줄리엣은 소재를 결정한다.
왜 독서 모임 이름은 '건지 감자껍질 파이'였을까. 편지에 쓰인 돼지구이는 또 무슨 이야기일까. 그 사연은 2차 대전 중 유일하게 독일군에게 점령된 영토였던 채널 제도의 건지섬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멜리아는 "나치 독일이 건지 섬을 점령했던 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식구들의 모습ⓒ 넷플릭스
독일군은 건지 섬 주민들의 식량을 빼앗고 주민들 사이의 교류도 엄격하게 감시한다. 건지 섬에서 나는 모든 가축은 군용 식량으로 동원되면서, 주민들은 육류를 전혀 먹을 수 없게 된다. 그러던 중 건지섬의 농장주 아멜리아는 독일군 몰래 돼지를 기르고, 아멜리아를 친어머니처럼 모시던 엘리자베스(제시카 브라운 핀들레이)가 돼지구이 만찬을 제안한다. 그렇게 주민들은 우울한 삶 속에 한 줄기의 빛같은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기분 좋게 돼지구이를 먹고 통금 시간을 넘겨 집에 돌아가다가 그만 독일군에 붙잡히고 만다. '무슨 모임이냐'는 독일군의 질문에 이들은 독서 모임일 뿐이라고 둘러댄다. 그때 술에 취한 일원이 돼지고기와 함께 먹었던 '감자껍질 파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독서 모임 이름은 어부지리로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이 된다. 이후 고기를 먹기 위해 만난 사람들은 독일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진짜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소통에 대한 염원 또한 풀게 되었다.
건지 섬에 닥친 비극을 수면 위에 올린 것은 줄리엣(릴리 제임스)였다. 그는 독서 모임 사람들의 끈끈한 유대감을 접한 줄리엣은 독일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아멜리아와 노예 아이를 구하려다 섬에서 추방 당한 엘리자베스의 사연을 글로 쓰고자 결심한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독자가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이 영화의 관객은 줄리엣이 듣고 느낀 그대로 전해주는 이야기를 통해, 나치 독일이 건지 섬을 점령했던 그 시절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되고 주민들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줄리엣이 건지 섬의 북클럽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엘리자베스의 딸인 킷은 도시 애덤스를 아빠라고 부른다. 줄리엣은 애덤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킷이 정말 그의 딸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킷의 엄마인 엘리자베스에게 닥친 불운과 그의 희생정신까지 알게 된다.
극중에서 작가는 북클럽 일원들에게 애정을 갖고 하나둘씩 의문점을 해결해 나간다. 그리고 건지섬 주민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필력으로 독자들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생면부지의 건지 섬의 북클럽 사람들과 런던에서 온 줄리엣의 유대감을 보면 줄리엣의 고민이 이해가 된다.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이야기를 써내가려는 작가라면 가질 수 있을 법한 애환이기도 하다.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도시 애덤스와의 인연을 통해 줄리엣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친한 친구였던 엘리자베스의 딸 킷을 자신의 딸처럼 키운 애덤스에게 마음을 준 이상, 줄리엣은 돈이 많고 거만한 약혼자 마크에게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줄리엣과 도시의 모습ⓒ 넷플릭스
독일군의 점령으로 암울하던 시절, 돼지구이로 시작해 독서 모임을 통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주민들. 이 이야기를 듣고 줄리엣은 그리운 얼굴이 무엇인지, 인생에서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줄리엣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시선을 끌었다. 전반부에서는 잘 나가는 작가가 어떻게 매력적인 소설을 탄생시키는가에 관심을 가졌다면 후반부에서는 그녀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마크 대신 이름 모를 건지 섬의 농부인 도시 애덤스를 배우자로 선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여정을 엿볼 수 있었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 애덤스를 만나기 전 줄리엣이 자신이 생각하는 소중한 가치를 모르고 지내온 것처럼 아직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혹은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줄리엣에서 나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진로를 정하지 못해 방황할 때 나와의 대화를 끊임없이 시도하지 않았다면 인생에서 뭘 빼면 살아갈 수 없는지에 대한 정의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줄리엣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유대감이 필요하다고 깨달은 것처럼 나역시 사람들과의 교류와 그들과의 추억들을 글로 남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인생에도 줄리엣이 도시 애덤스 같은 사람을 만나 그녀 자신에 탐구를 확장해나간 것처럼 나에게도 내 자신에 대해 좀더 알아가는 여정을 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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