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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방송, 유투브 리뷰

휴대폰이 없었던 그때... 우리의 연애는 더 낭만적이었다

by 고고와 디디 2019.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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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하루에도 몇 번씩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나로서는 이게 없던 시절에 어떻게 지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기다림의 즐거움과 느림의 미학이 있었던 과거 그 시절로 돌려보낸 것은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영화 이야기의 배경이 1994년 가수 유열이 DJ를 처음 진행한 날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되는 시절이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설정 때문에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다른 영화와 결을 달리 할 수 있었다.
 
영화 줄거리는 간단하다. 엄마가 남겨준 빵집에서 일하던 미수(김고은)는 빵집에 붙여 있던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을 한 현우(정해인)와 하루하루를 공유하게 되면서 설레는 감정을 가진 찰나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는 바람에 연락이 끊기게 되는 이야기이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 아트하우스

   
맨 처음 이별은 현우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다 사건에 휘말려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면서였다. 휴대폰이 없어 연락을 쉽사리 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생기는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그들의 헤어짐은 안타까웠고 소중했다. 우연히 현우를 다시 만나게 된 미수는 하필 다음날이 현우의 군대 입대 날이라 부랴부랴 그와 연락하기 위해 그가 미수의 방에서 잠든 사이 그의 이메일 계정을 만든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날로그적인 영화의 템포에 나조차 그 느림에 빠져들어가는 듯하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 아트하우스

 
애써 만들어준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빠트린 사실에 안타까워하는 미수의 모습을 보면서 그럼에도 '읽지않음'으로 가득한 이메일을 보내는 미수를 보면 어리석기보다는 그 낭만에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우리가 삶이 편리해진 만큼 잃어버린 낭만이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다음으로 라디오 방송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온다. 현우는 무거운 성정의 사람이다. 영화 초반에 비추어주는 것처럼 학교 교복을 입고 두부를 한입 베어 물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소년원에서 들어갔다 나온 사연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소년원에서 그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라디오 방송 덕분이었는데 눈뜨고 방송을 듣고 곧바로 소년원에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오해가 드디어 풀려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현우는 옥상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그 중 한 친구가 실수로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게 되자 죄를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동시에 아침 방송이 끝날 즈음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는 소년원 안에서 그 희망이 사라짐을 느끼는 하루에도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왔다.
 
이것뿐이 아니다. 오해가 쌓여 잠시 헤어져 있던 미수와 현우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도 유열이 라디오 방송에서 유열이 현우를 대신해 미수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현우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은 여자친구가 된 미수뿐이 아니다. 현우의 과거가 영화가 끝날쯤에 공개되기 때문에 관객들은 그가 어쩌다 무거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럼에도 항상 밝게 웃고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된다.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컷ⓒ CGV 아트하우스

 
미수는 현우가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이 애쓰는 몸짓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 질문은 현답을 위한 우문이었음이 밝혀지는데 현우는 자신은 인생에 있어 한두 가지만 좋은 것만 있어도 즐겁다고 답한다. 밑바닥까지 내려앉아 봤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대답을 듣는 순간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후반부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그가 저지르지 않은 죄로 소년원을 들락거리고 이후 진로조차 불투명해진 최악의 상황에서 그가 발견한 건 그럼에도 그가 좋아하는 몇 가지는 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 하나는 미수였다.
 
제목이 유열의 음악앨범으로 잡아 놓은 것에 비해 유열의 음악앨범과 영화 속 이야기는 접점이 별로 없어 보인다. 미수와 현우의 엇갈림의 이유가 되지도 않고 그들의 사연에 관련된 소재로도 써먹지 않는다. 그럼에도 1994년 시절의 낭만을 다시금 불러온 것은 현우라는 입체적인 인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우의 일대기를 적재적소에 하나씩 배치하면서 현우의 상황에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 덕분에 옥의 티가 있을지언정 전해주는 메시지가 확연하게 보였다.

시간을 절약할 수만 있다면 기기에 의존하려는 나였기에 이렇듯 신선하게 다가오는 과거의 향수에 젖어보는 시간을 준 게 참 고맙다. 하루를 시간 단위로 쪼개어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한 하루를 보냈다 자책하던 내 자신에서 정지, 쉼의 미덕을 다시금 떠올렸다고 해야 될까. 가끔은 멍하니 앉아있기도, 다음 글의 소재를 생각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인데 자주 이 소중함을 잊고 산다.